정윤2010/03/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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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이 크롤러 2008 오시이마모루 작.)

  람은 한번은 죽는다. '죽을 뻔했어.' '죽다 살아났네' 등등의 말그대로 할'뻔한 이야기' 아닌, 맥박이 정지하고 뇌파가 일정선을 긋고 있는 말그대로의 죽음은 한번뿐이라는 것이다.
최근에 보고 있는 미드 배틀스타 갈락티카의 '사일론'의 복제에 대한 그럴싸한 설정이 부러워서일까?  아니면, 최근 일련의 죽음을 경시하는 모습이 못미더워였을까? 여하튼, 이런 저런 죽음이라는 생각들을 문득문득 해본다.

 이러한 현실적 사고 방식으로는 결과를 도출할수 없는 문제제기를 할라 치면, 한편의 영화가 떠오른다. '스카이크롤러' 벌써 2년전이 되어 버렸지만,당시 바쁜일정 속에도 쪼개고 쪼개 부산국제 영화제를 가서 제일 먼저 본 영화였다.  

내용은 이러하다. 가까운 미래 사회는 평화를 맞이 하였지만, 사람들은 그러한 평화에 안주하지 않고, 이전의 피비린내 나는 자극을 그리워 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탄생한 스포츠가 전쟁. 제약회사의 상품인 불로불사하는 '킬드레'라는 이들이 전쟁을 맡은스폰 회사의 파일럿이 되어, 티브이속 오락으로 비추어지는 가상의 전쟁을 하게 되는 것이다.

티브이속 화면은 마치 우리가 여가시간 즐겨하는 게임과 비슷하다. 파일럿 이름이 나오고 에이스들의 대결구조 속에서 드라마가 형성되며, 한편의 단락이 끝나는 듯한 전쟁은 격추되어 버린 '킬드레'들이 죽지 않고 다시 돌아올 뿐이지, 오래전 그들이 진저리 냈던 그러나 지금은 아쉬워 하는 죽여야지만 직성이 풀리는 전쟁과 다를바가 없다.

영화가 인상깊었던 것은 이러한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오는 킬드레들의 설정이 었던 것 같다.  10대쯤으로 보이는 이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살았는지 모른다. 반복되는 의미없는 죽음은 삶의 희망을 심을수도 없이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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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한 사회에 죽지 않고 살아간다라는 것이란.)

어쩌면, 이러한 설정은 누군가에 희망고문을 당하는 지금의 청춘들을 상징한 부분이지만, 지금에 와서 느끼지만, 영화속 '킬드레'들 또한 죽을 뻔한 일들의 반복이기에 삶이 가치가 없어지는 것이 아닐까?

 인터넷을 뒤적이다. 진정성이 결여된 뻔한 기사들 사이에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이라는 기사를 보고 이생각 저생각이 들어 끄적여 보았다. 어찌되었건 그분의 희생은 이러한 뻔한 이야기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기사이니 말이다.

끝으로, 나 또한 뻔한 이야기는 사절을 외치지만,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 진정성이 결여된 사회에 진정성이란 찾을수 없는 뻔한 놈은 되기 싫은데 말이다.


 

 
2010/03/27 00:00 2010/03/27 00:00
Posted by 정윤
정윤2010/02/25 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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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가 좋았던 순간, The moment that I loved you , 29.5 x 42cm, Marker and pen on the paper, 2009 김대현 )

'또 시작이군....'

 'L'은 쫓기고 있다. 그의 꿈속에서는 늘 알수없는 누군가에게 쫓기는 꿈이다. 한달에 다섯번쯤은 지금과 같은 쫓기는 꿈을 꾼다. 매일 반복되는 같은 꿈은 아니지만, 언제나 대강의 스토리는 비슷하다. 뜬금없이 시대를 알수없는 곳으로 가서는 '책'이라든지, '머리핀' '장갑'을 움켜 쥐고는 뛰기 시작하는 것이다. (심할때는 동굴안에서 아이를 안고 뛴적도 있다.) 그러면 뒤에서 소리를 지르며 사람들이 쫒아오기 시작하는 대강의 스토리이다. 처음에는 굉장히 당혹스럽기도 괴로운 악몽이었지만, 최근에 와서야 'L'은 그나마 이러한 반박되는 꿈에 적응을 하였다. 그리고 심지어는 약간씩 달라지는 배경과 물건등에 안도감을 느끼고는 한다. 사오년 전부터 시작한 이러한 몇번의 반복되는 꿈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같다라면 정말로 못견딜거라는 생각을 하는 'L'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어처구니 없는 '절도'는 마치 영화처럼 나의 이성으로 통제할수 없는 제 삼자의 상황에서 어떠한 것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부터 일인칭 시점이 되어 시작이 된다. 문제는 이러한 꿈에서 깨어나면 마치 실제로 있었던 일 인 마냥 지치고 힘든 하루가 시작 된다라는 것이다.
평범한 샐러리맨의 'L'은 이러한 꿈을 꾼 날이면, 부시시한 몰골로 출근하여 걱정하는 주변 동료들에게 '불면증에 걸려서'라는 외마디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고는 하루를 시작하게 된다. 마치 그가 꾸는 반복의 꿈과도 마찬가지로 말이다.

 몇일간 숙면을 취한 그 이기에 이번에도 온 힘을 다하여 뛰기 시작한다. 대강의 지리는 언제나 비슷하기에 현실에서의 동네길 마냥 구석구석 헤집고 뛰기 시작한다. 다행이 이번에는 내리막에 시작했기에 전번보다는 덜 지칠거라는 생각을 가진다. L은 도망가며 손안에 쥔 물건을 보기 시작한다. 인형이다. L은 어이없어 하며 다시 골목길에 들어간다. 쫓아오는 사람들도 어제 푹 쉬었는지 저번보다 더욱 열심히 쫓아온다. 네 다섯명이 맹렬히 쫓아오는 소리는 언제들어도 박진감 넘친다. 잡히면 뼈도 못추를것 같다 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때가 꼬질꼬질한 인형을 쥐고 도망치는 'L'은 사건의 과정을 정리 해본다. 어린아이의 인형을 갑자기 빼앗은 것이다. 숨이 턱끝에 차 헉헉거리며 주변을 둘러본다. 시대를 알수는 없지만, 과거에 한번은 와 봄직한 곳이라는 생각을 가져 본다.

'이쪽으로....'
'헉헉... 빨리 닫아요. 사람들이 쫓아온단 말이오. 오늘은 왜이리 늦게 나타난거요?'
'문이 안 닫혀요.'
'좀~! 말좀 들으시지 ~! 지난번에 몇번이나 고치라고 했건만.'
'네?'

 가상의 그녀라고 생각한 'L'이기에 헛 웃음이 나온다. 그는 언제나 본 얼굴이지만, 그녀는 내가 처음일테니 언제나 문을 고쳐놓으라고 한들 그녀가 고쳐놓았을까? 이런저런 생각들이 마릿속에 교차하며, 재빨리 그녀의 손을 잡고 담벼락 엉쿨 뒤로 숨는다. 꽤 오래되고 규모도 큰 장미 넝쿨이라 여기저기 따끔거린다. 항상 그랬듯이 문은 고장난 문이고, 이 여성은 누군지 모른다. 엉거주춤하게 'L'이 그녀를 감싸 듯 넝쿨을 막으며, 숨을 죽이기 시작한다. 그는 생각한다. 이때가 지금 그의 꿈 속에서 가장 심장이 터질것 같은 장면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쫓기는 자의 긴박감이라 생각했지만, 어쩌면, 비슷한 또래의 그녀와 엉거주춤하게 안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어쩌면,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부터 'L'의 꿈은 더욱 길어졌는지도.

'찾아~! 여기에 숨어 들었으니.'

처음 이 꿈을 꾸었을때 몇달간 이즈음에 긴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일부러 잡히기도 하였다. 그는 자기가 왜 도망을 가야 하는지 그리고 간혹 정말 훔친 것들 중에는 귀중해보이는 것도 있었으나, 대부분이 손때 묻은 오래되고 필요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돌려드리지요' 하며 숨던 넝쿨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녀는 나를 계속 쫓아오며, 울기 시작하며 나는 그들의 손에서 끌려가기 시작한다. 후각으로 느껴지는 공포의 냄새는 이 꿈의 절정이다. 죽을수도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는 찰나, L은 잠에서 깨어나고는 땀을 한벅 닦고는 꿈에대해 곰곰히 생각하다. 다시 잠에 들기도 하였다.

'쉿 '

내가 뒤척이자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겁에 질려있는 눈빛으로 L의 입에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한다. 언제부터인지 원래의 이야기는 긴장감에 'L'이 일어나 그들에게 잡혀가야하는 타이밍이지만, 그녀는 'L'에게 가만히 숨죽이고 있으라는 무언의 종용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 이러한 행동을 접했을때 미리 알고 있는 꿈의 스토리와는 다르기에 당혹감마저 들었으며, 언제나 같은 스토리에 실증났었던 'L'이었기에 호기심 마저 들었었다. 지난번에는 가만히 숨어있어도 잡혔었다. 언젠가 주말의 명화에서 본 '프레데터'를 연상케하는 사납게 생긴자가 덩쿨 쪽으로 다가와 움찔해 하던 'L'과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그는 이번에는 잡히지 말아보자라는 무언의 다짐을 하며 숨을 죽인다.

'눈 감아요.'

그녀와 'L'은 숨도 쉬지 않고 누군가가 오는 발자욱 소리를 유심히 들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이번에도 저번과 같이 긴장감이 고조가 된다. 아이러니 하게도 자기가 마음대로 만들수도 있는 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쉭쉭'대며 거친숨소리를 내어가며 두리번거리는 무리들은 그렇게 '절도범'을 한참을 찾다 다음 블럭으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다행이 무사히 넘어 간 것이다. 그들은 더욱 비탈진 곳으로 내려가기 시작한다. 외마디 경고의 말을 내뱉으며, 음성은 점점 멀어져 간다.

그녀와 'L'은 넝쿨에서 나와 한동안 그들이 떠난 자리를 바라보다. 그들이 샅샅이 뒤진 집으로 들어간다. 처음 들어가는 것임에도 낮이 익다. 먼지가 자욱한 보잘것없는 식기와 곧 스러질것만 같은 식탁 그리고 침대와 소파가 보인다. 침대위에는 붉은색 자명종 시계가 째깍째깍 흘러가고 있다. 보통의 평범한 현실의 'L'의 방안이다.

' ! '

시선을 그녀에게 돌리다말고 다시금 바로 전에 바라본 것들을 주의깊게 바라본다. 맙소사~! 'L'이 아끼는 오래된 소파가 있다. 어이없게도... 그리고 'L'의 것과 같은 침대와 자명종시계도 말이다. 집에 들어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L'은 현실속 일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늘상 하는 버릇대로 스프링이 튕겨나갈 듯이 소파에 주저 않는다. 방금 전 까지 목숨걸고 들고 뛰었던 인형은 바닥에다 아무렇게나 던저 놓았은체 말이다. 같은 꿈을 수 없이 꾸어 왔지만, 지금 쯤은 한기를 느끼며 깨어나야 할 시간이다. 현실에서 붉은색 자명종 시계를 보아야 하며, 쇼파에서 일어나 이마에 송글송글 맺혀져 있는 땀을 닦으며, 약간은 철 지난 커버로 쒸어져 있는 침대로가 시계를 한번 확인 후 잠들어야 한다. 방안에 걸려있는 그림을 보며, 'L'은 생각 생각에 잠긴다. 여러장의 그림처럼 포개어져 있는 '내'가 또 다른 '내'가 들추고 있는 듯한 그림은 마치 오래전 기억을 찾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L'이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인형을 줍는다. 그리고 마치 자기 것인마냥 가슴에 꼭 품는다. 시계는 4시 30분을 향하고 있다. 언제나 4시에 잠을 깼기에, 저 시계가 맞는다면, L은 30분 더 자고 있는 것이며, 그는 이제껏 꿈을 꾸며 느껴본적이 없는 묘한 전율감이 흘렀다. 'L'은 그림에서 시선을 때며 심호흡을 해본다. 이제 앞으로의 흘러가는 이야기는 전혀 알수없다 라는 무언의 말이 귓가에 맴돈다. 그 순간 'L'은 한 순간 좀더 깊게 빠저 들어가는 가위눌림 같은 것을 느꼈다. 어질러 있는 듯한 가상의 지금에서 현실로 나오고 싶지만, 그럴수 있는 방법을 잃어버린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좀더 깊은 잠을 잘수도 있다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2010/02/25 05:19 2010/02/25 05:19
Posted by 정윤
정윤2010/02/19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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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차르트가 세상을 돌아다니며 음악을 하겠다고 하자 그의 아버지 레오폴드가 말린다 이때 남작부인이 불렀던 노래. '황금별'
작곡가 실베르타 르베이가 세계 최고의 남작부인이라 했다던데 정말 슬픈 장면이 아니었는데도 노래만 듣고 울어버렸다. 건차르트(박건형)도 잘 했지만, 내 머리속엔 우리 신영숙님이 부르신 '황금별'만 울린다. 아 또 눈물나오려 하네 아~~ 노래 너무 좋다. 영어건 경영학이건 다 때려치우고 연극학교나 들어가?

'그렇군요.'
'제가 당신들에게 옛날이야기 하나 들려 드리죠.'
'제 얘기 한번 들어보시겠어요?'

'옛날이야기요?'

아주 먼 옛날에 한 왕이 아들과 함께 살았다네. 세상을 두려워하면서
늘 왕자 걱정에 잠들 수가 없었지 성벽을 높이고 문도 굳게 닫았네.
어느 날 바람결에 실려 온 그리움 혼자 있는 왕자에게 속삭였네.

북두칠성 빛나는 밤에 하늘을 봐 황금별이 떨어질 거야
황금별을 찾기 원하면 인생은 너에겐 배움터 그 별을 찾아 떠나야만 해

왕은 말하곤 했지 이 세상은 파멸로 가득 찼다 난 결코 밖을 보지 않아
저 세상에서 널 지키겠다 하셨네. 성벽을 높이고 문도 굳게 닫았네.
하지만 뛰는 가슴 멈출 수는 없어 왕잔 성벽 너머 세상 꿈꾸었네.

자 여길 떠나 저 성벽 넘어 그 별을 찾으러 여행을 떠나야 해
험한 세상 너 사는 이유 이 모든 걸 알고 싶다면 너 혼자 여행 떠나야만 해

사랑이란 구속하지 않는 것 사랑은 자유롭게 놓아 주는 것
때로는 아픔도 감수해야 해 사랑은 눈물 그것이 사랑

황금별이 떨어질 때면 세상을 향해서 여행을 떠나야 해
북두칠성 빛나는 밤에 저 높은 성벽을 넘어서 아무도 가보지 못 한 그 곳으로
저 세상을 향해서 날아봐
날아올라


                                               
                         - 뮤지컬 모차르트 중 발트슈타텐 남작부인(신영숙)이 부른 ' 황금별 (Gold von den sternrn)


2010/02/19 00:47 2010/02/19 00:47
Posted by 정윤
정윤2010/02/08 23:32
 최근에 '용서는 없다.'라는 영화를 보고 많은 생각들이 든다. 김형준 감독의 첫 장편영화이며, 그의 러닝타임내내에는 동시대 대한민국의 옭고그름을 확단할수 없는 문제점들과 이러한 문제점들은 과거에서부터 시작이 되었다라는 영화의 커다란 호흡은, 강민호(설경구역)와 이성호(류승범)만의 가족사에대한 엃히고 설킨 문제점들이 아니라 오래전 대한민국이 근대화부터 가지고 있었던, 아니 이전부터 내재하고 있었던 '불합리'이다. 이는 감독이 인터뷰한 내용중 '흑과 백이 정확하지 않은 세상사는 이야기'의 내용과 어느정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감독의 다짐대로 영화는 한국판 멋진 '양들의 침묵'과도 같은 지능형 스릴러가 되었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아쉬웠던 부분은 영화를 보고 나오며, 영화에서 가지는 회색빛의 '복수'가 어디선가 많이 본듯한 느낌이라는 것이다. 벌써 7년전의 이야기가 되어버렸지만, 박찬욱감독의 '올드보이'의 마지막과 비슷하다라는 느낌은, '아류'라는 실망이 아닌, '누구'에게 피해를 준 '누구' 혹은 사회에 응징을 해야지만 끝이나는 이러한 장르물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라는 것에 대한 실망일 것이다. 김형준 감독이 말한대로 회색빛의 사회에서 풀리지 않는 불합리가 많다라는 '예시'에 대한 실망감. 물론 법치제도권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법'이 가지는 응징이 있지만, 언제인가 말했듯이 음지의 우리네 약자들에게는 멀게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생각하는 복수가 가질수 있는 최고의 응징이, 마치 이슬람문화권에서 말하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식의 피 비린내 나는 복수만이 최고의 복수일까?라는 의문감에서 비롯된 글쓰기이지만. 곰곰히 생각해보건데 기독교식, 용서와 회개 또한 왠지 당사자가 당한 피해에 성이 차질 않겠지만, 용서 또한 복수에 대한 하나의 방법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가져본다. 그렇다면- 이전 한국 영화사의 영화속에서 복수와 용서 그리고 구원에대한 짦은 이야기들을 알아보는 것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최근 10년동안의 영화속에서 동시대속 우리들이 살아가는 사회속 본질 또한 볼수 있는 것이니 말이다.
성당신부님께서는 곧잘 이런 말씀을 하신다. 악마가 인간을 옳지않은 길로 가게 악착같이 붙어 다니는 것은 신의 은총을 받은 인간이기에 이러한 인간을 시샘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야기를 하기 전에 지난 주 성당에서 신부님께서 말씀하신 강론 일부분이 생각난다.'...인간은 행복한 존재입니다. 우리가 많은 잘못을 하여도, 하나님은, 회개만으로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시니까요....'

 '용서는 없다.'의 영화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회개만이 답이라는 종교적 구원의 논리을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사람들이 가지는 감정의 변화 '복수와 '용서' 사이의 애매모호한 줄타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하는 것이다. 이야기를 하기 전에 이러한 설정을 해보았다. 단순히 '복수'라는 설정만으로는 수백편의 영화들을 추려내기 어려우므로- 자신이 복수를 할수밖에 없게된 상황에서의 감정의 변화가 인상적이었던 네편의 작품만 추려보았으며, 마지막으로 앞서 이야기한 이러한 문제의 근원이 불합리에서 비롯되었으며, 이러한 현상은 비롯 최근의 문제가 아닌, 근대화 시절부터 거슬러 올라간다라는 가정하에 근대화 한국 소설 한편을 꺼내보았다. 그들 혹은 그녀들은 가슴이 아려오는 용서를 하기도, 혹은 피비릿내나는 복수를 하였다. 단순히 네편만으로 추스렸으나, 나중에 시간이 날때 지금 이야기 하지 않은 영화속 캐릭터들을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 되지않을까 싶다. 글쓰기의 시작은 영화 속 류승범의 냉혹한 눈빛에 압도당해 시작하게 된 계기지만, 이야기가 많이 길어지고 힘들것 같아 연기를 아주~ 잘한 류승범이 원망스러워지기도 하다.(쿨럭....)

  용서에 대한 고찰. - 밀양(2007)의 이신애와 우.행.시(2006)의 정윤수에 대한 이야기.

 우선 용서에 대한 이야기를 할까한다. 이 두편의 영화에 나오는 신애와 윤수는 마치 오래전,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가 가지는 19세기 문학의 캐릭터들을 닮아 있다. 그들은 오래전 종교문학이 가지는 대표적인 '얀센니즘'속의 캐릭터들이다. 그들은 결코 구원을 얻을수도 또한 자신이 구원을 줄수도 없는 미약한 존재이다. 자식을 죽인 살인자에게 용서를 하려하여도 그녀(신애)는 결코 '신'이 아니기에 용서를 줄수 없다. 영화속 신애의 대사에서, '나만이 그에게 용서를 줄수가 있는 것이다'라며 울부짓는 장면은 개인과 개인으로서의 관계를 뛰어넘어, 그녀의 복수의 대상은 종교가 되며, 결국 이룰수없는 복수가 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아니, 영화에서 종종 존재감있게 보여주는 '빛'의 설정은(제목부터가 '밀양-'시크릿 선샤인'이다.) 이러한 낮은위치에 있는 '사람'으로서의 대립되는 '절대자'의 시선 즉 '빛'이라는 설정을 통하여, 마치 사람위의 종교의 시각을 보여준다. 결국 영화에서 그녀는 자식을 잃은 슬픔에 대한 분노를 광범위하게 하게 되지만, 감독은 울고부는 신애에 어떠한 답을 주지 않는다. 감독은 그저 종찬(송강호역)의 시선이되어 신애를 따라다니기만 한다. 감독의 답은 이러한 것이리라. 마치 성당의 강론에서 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바라는 것 기도하는 것 자체에 대한 '무엇'를 주는 것이 아닌, 바램에서의 이루어질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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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용서'에 대한 이해할수 없는 신애와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는 종찬 그리고 Secret Sunshine.

 또 다른, 한편의 영화 '우행시'의 윤수(강동원역)에서도 그는 우발적인 살인(여기서 나는 이러한 윤수의 살인은 전반적인 사회에 대한 복수라 생각했다.)이었음에도 앞서 이야기 하였듯이 '얀센주의' 식으로의 용서받을수없는 사형수이다. 하지만, 모든것에 불만 뿐인 유정(이나영역)을 만나 둘은 상처가 치유가 되며, 둘이 가진 목적없는 모든것에 대한 복수는 순화되어, 구원을 바라게 된다. 마치 도스토예프스키의 '최와벌'에서 나오는 '쏘냐'와 '라스콜리니코프'처럼말이다.  
하지만 이창동감독과 마찬가지 송해성 감독 또한,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주지는 않는다. 느릿느릿한 템포로 그가 되었든 그녀가 되었든 아니, 그들이 행하였던, 객체없는 무형의 복수심으로 행한 행동(살인과 종교모독)에 어떠한, 구원은 없다. 그렇지만 이러한 두편의 영화속 현재 어디엔가 살고있을 또 살았을 그들을 바라보았을때, 그들은 복수를 후회하였으며, 용서를 갈구 하였으며, 또한, 영화에서 가지는 화두, '사람이 사람을 처벌하고 심판할수 있는가에 대한 감독의 물음'에 악착같이 질문의 '답'을 구한다.
 결과적으로 둘의 캐릭터는 피해자와 가해자로서 많이 아파했으며, 복수를 한자는 용서를, 구원를 행하려는 자는 복수를 선택하였다라는 것이다. 객체에서 사회적인 복수심과 사회적으로서 객체적에대한 용서와 구원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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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사람을 처벌하고 심판할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 우리들의 행복했던 시간

       복수에 대한 고찰. - 올드보이(2003)의 오대수와 친절한 금자씨(2005)의 이금자에 대한 이야기.

 두번째는 말 그대로 서로에게 피 눈물나게 했던 '복수'이다. 어쩌면, 근친상간과 감금 학생과 선생의 매춘등 사회에서 금기시하였던, 것들을 영화의 소주제로 다루었던 것에 당시 사회적인 이슈는 대단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오대수와 이금자는 어쩌면 박찬욱감독의 머릿속에서 나온 '남매'와 같은 캐릭터들이다. 둘은 자신들의 세치혀로 수아(윤진서역)와 철부지 어린 아이를 죽이게 된다. 물론, 스토리는 다르지만, 우리가 주의깊게 보아야 할것은, 그들이 기만한 것들 즉, 책임 없는 말 한마디에서 부터 문제가 일어났다 라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그들은 복수를 감행한다. 우진(유지태역)과의 싸움은 처음 이야기 했던 '용서는 없다.'의 민호와 성호와의 자존심이 걸린 '원초적 싸움'이다. 칠년동안 복수를 준비한 우진은 결국 자신의 굴례를 벗어나는 자살을 선택하며 살아남은 대수에게는 죽어야지만 풀리는 복수(미도와의 근친상간)를 하였다. 마치 신화속의 오이디푸스처럼이나, 그는 자신의 '눈'대신 혀를 잘았으며, 앞으로 자신을 이성으로 사랑하는 딸 미도에게 말못하며, 괴로워하며 살아갈것이다. 죽으려 해도 미도가 가만히 죽게 가만놔두지 않을 것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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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는 결국 복수를 한 것일까? 우진은 오랜시간 고통에서 벗어날수 있었던 것일까?

  친절한 금자씨의 금자 또한, 백선생에게 십삼년동안 복역하면서 만난 지인들의 도움으로 복수를 감행한다. 그녀의 복수는 후에 나온 작품만큼 더욱 악랄하다. 선과 악이 모호해저버린 복수는 같지만서도, 피해자의 부모들을 끌어들여, 백선생과 같은 살인자로 만들어 버린 장면은, 올드보이의 '장도리씬'만큼이나 인상깊게 남을만한 장면이다. 이들의 복수는 '신화'와 닮아 있다. 그렇다면 앞서 이야기한, 복수라는 카테고리에서의 '용서'(용서 또한 복수의 한 장르임을 생각하였다.)와 말그대로 똑같은 '앙갚음'을 보았다. 이는 우리가 삶속의 희곡(喜劇)이라 하는 신화속 이야기와 삶의 지침서와 같은 종교와도 같다. 그렇다면, 영화 속 신애,윤수,대수,금자를 보았을때, 이는 논픽션일지라도, 당시 개봉년도의 우리 삶속에 젖어있는 실제 우리들의 모습이다. 이들은, 결국 살인을 하고, 간음 을 하였다. 또한 종교를 빌려 문제를 해결하려하기도 자신의 치밀함으로 극복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문제해결 즉 복수와 용서 뒤의 결말은 썩 시원하지가 못하다. 원인을 해결해도 풀리지 않는 결말은 수학적 이론인 뫼비우스의 띠와도 같다. 이러한 모순이 일어나는 이유는 이들의 원인제공자가 동시대 속 '나'와 '너'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모순'에서 우리는 어떻게 벗어날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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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은 결코 정당화 될수는 없다. 하지만, 흑과 백이 정확하지 않은 세상살이에서는 '살인의 동기'가 누구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라면.

                        강한 자와 약한 자의 이분법적인 사회논리-'강해져야 하는 약한 자의 슬픔'. 

 복수를 한자는 '나와너'이고 이러한 원인제공자는 '너와나'인 아이러니한 대답에 구체적 이야기의 살을 덧 붙이기전에 김동인의 '약한자의 슬픔'이라는 책에 대해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이 작품은 사회적으로 '강한 자'와 '약한 자'의 이 분법적인 논리로 이루어져 있음을 말하고 있다. 특히, 약한자로 대변되는 엘리자벳을 통하여 강한자들로 대변되는 남작에게 복수하는 방법은 자신 스스로가 더 강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내용의 소설은 당시의 이러한 어두운 사회면에서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며 작가가 생각하는 약한자들이 사회에서 살아남는 방법이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건데, 한권의 소설이 한 세기가 지난 현대화된 근래의 이야기 부분들과도 일맥상통한다라는 것에 놀랍기도 하다.
 책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나'와'너' 피해자이든 가해자이든 앞으로 남게되는 고통을 이겨낼수 있는 강함을 이야기 하고 싶어서이다. 사회속의 가해자와 피해자는 결국 복수와 용서를 통해서 입장이 달라질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지리멸렬한 선택과 기로를 끝낼수 있는 대안은 다시 한번 강조하여 '극복할수 있는 강함'이라는 생각이다.
 '복수와 용서에 대한 고찰'이라는 제목으로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것 같다. 우리의 현재와 과거를 비추어 보았을때, 자신의 영욕으로 인하여 상대방에게 복수의 구실을 마련하게 해주었던 것이며, 그리고 이러한 잔인한 모습을 취하였을때 나 스스로가 거울 속 또 다른 나를 보며 겁을 먹었던것이라고 말이다. 친절한 금자씨에 나오는 피해자의 가족들처럼 같은 가해자가 되어야 하는것인지, 아니면 밀양의 신애 처럼 가슴을 아리며 용서를 주어야 하는 것인지 이러한 선택의 기로에 놓였을때 나는 아직도 복수와 용서에서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물론 앞서 말한 복수를 이야기하면서, 우진과 대수를 보더라도 어떠한 복수라도 결코 원인에서 자유로워 질수 없다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어쩌면, 사회 탓으로 돌리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을까 싶다. 갈수록 어려워지고 난해지고 있는 사회라는 메인프로그램이 인간과 맞지 않아서 말이다. 마치 영화 매트릭스에서 아키텍트가 말한대로 매트릭스의 완벽한 프로그램에도 인간의 불완전성을 계산하지 못해서 오류가 나듯이 말이다.

 끝으로 '복수'와 '용서'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에 찾아보았다. 복수는 '원수를 갚음'이라고 되어 있으며, 용서는 '지은 죄나 잘못한 일에 대하여 꾸짖거나 벌하지 아니하고 덮어 줌' 이라 되어 있다. 간단히 설명되어 있는 이 두 단어에 몇 마디를 더 덧 붙여주고 싶다. '준 자도 받은 자도 떨떠름하며, 주고 받은 사이면서도 그렇게 사이가 좋지만은 않으며, 준 자 받은 자 덮은 자 둘 중 한명은 죽을수도 있다. 혹은 둘 다 죽을수도 있다.' 라고.

과거에 혹은 앞으로의 누군가에 의해 어떠한 복수 혹은 용서를 계획하고 있다면, 원인 제공자보다 더 강해지고 나서 계획을 세우기를 바라는 바이다, 원인 제공자가 '무형'이든지 '유형'이든지, 강해지지 않은체 복수나 용서를 해버렸다면 굴례를 벗어나기 위한 행위는 자칫 남은 삶 동안 더욱 깊은 굴례에 빠져버리는 일이 될수도 있을테니 말이다. 나 또한 지금까지도 애매모호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다. 그만큼 자신의 한(恨)을 뛰어넘기라는 것이 어렵다라는  생각을 가져본다.  
2010/02/08 23:32 2010/02/08 23:32
Posted by 정윤
정윤2010/02/04 03:53
 스포츠중계를 많이 좋아하는지라, 군대친구와 소주한잔기울일때면, 언제나 안주는 프로야구와 해외축구이야기이다. 한지붕 두가족인  LG트윈스와 두산베어스를 좋아하는 둘인지라, 서로 만나면, 상대방 팀 '까기'로 시작한다.
하지만, 잔이 한잔 두잔 들어가다보면, 한두해본 지인이 아닌지라, 서로의 팀을 존중해주는 발언들도 서슴치 않는다. 그만큼 프로의 라이벌 팀이지만서도, 스포츠의 기본인, 페어플레이와, 또 같은 종목에 열광하는 팬으로서의 존중일것이다. 지난주도 할일없는 '한량'신세라 전화통화로, 죽일놈 살릴놈 시간때우기 전화농담을 하고 있던 찰나. 우리의 선수들이 이제는 정말 나보다도 한참이나 어리다라는 것이 느껴졌다. 왠지모를 아쉬움과 어느덧 한살한살 먹어가는 나이가 무겁다라고 느낀적이 별로없었는데, 그날은 왜그렇게도 31이라는 나이가 무겁게 느껴지던지 31이라는 타이틀는 이제 스포츠 중계를 통해서는 노장에 들어가면서, 팀의 기둥들인 나이인것이다. 아직 어리다라고 생각하는 나에게는 하나의 충격이었으며, 또한, 새로운 시작에서 반드시 잘 되어야 한다라는 막중한 책임감이 들었다.

'아버지 이책 한번 읽어보세요. 아버지랑 동갑의 작가이랍니다~~'
'무슨내용인데?'
'아버지 젊을적의 사랑이야기라고 해야 할까요? 아들이 아버지께 권해드리기에는 조금 난처한것들이 많지만, 강하게 추천들어갑니다.'

'1Q84'와 '상실의 시대'를 조용히 서재에다 두었더랜다. 언제 작가의 약력을 보다가 문득 아버지와 동갑임을 알게 되면서, 또래의 아버지가 읽었을때 과연, 내가 읽었었던 어떠한 감정보다도 더 와닿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요즘 일련의 '일'등으로 그뒤 읽으셨는지, 혹은, 그대로 두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같은 시대를 사신 두분이기에 물론, 일본과 한국 당시의 문화는 달랐겠지만서도, 전공투 학생운동과, 또한 한국에서도 독재에 대항한, 학생운동이 일어난 비슷한 시기라 코드는 분명 '접점'이 있을거라 생각해본다. 마치 하루키씨가 당시 비틀즈와 넷킹콜을 들었던것 처럼 아버지 또한 당시의 음악감상실(?)에서 프랭크시나트라와, 넷킹콜을 들었듯이 말이다.

 이러듯 최근 회사를 나오면서, 집에 있는 시간이 늘면서, 이제껏 바쁘다라는 이유로, 관심을 가지지않은 것들에 관심을 가지며, 또한 좀더 나아가 먼지를 훌훌 털어내며, 예전의 것들을 보게 된다. 이런것들이 어린시절의 앨범일수도 있는 것이며, 가상의 60~70년대의 문화일수도 있는 것이고 말이다. 이러한 어떠한 객체사이의 '접점'의 위치에서 항상 이러한 생각을 가져본다. 현재의 나와 비슷한 길을 걷고 있는 누구를 말이다. 그는 현재의 61의 타이틀을 가지신 아버지이자 당시 31의 타이틀을 가지신 아버지이다. 어린시절 잠깐씩 떠오르는 흐릿한 영상으로는 지금의 아버지 밖에는 유추할수 없지만, 당시의 젊을적 음악다방에서, 지금의 어머니가 아닌 다른 이성과의 데이트를 하며 비틀즈와 넷킹콜 프랭크 시나트라를 들으시면서, 멋스럽게 이성을 유혹하는 아버지를 상상해보면 '백투더퓨처'의 영화에서 처럼이나, 큼지막한 과학적이고 물리적인 '드로이안'은 필요없다. 다만, 그 옆에 '쳇 베이커'를 찾고있는 나를 투영시키면 된다. 어쩌면, 시간이 흐르고 흘러도 당시의 코드와 지금의 코드는 항상 일치하고 있었을수도 있을거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하지만, 흔히들 이러한 접점을 놓칠수있게 되는 이유는 지금의 삶이 치열해서일 것이다.

'우리 어디서 만난적이 있지요?'

 31의 아버지와 31의 나는 다시한번 만나 대포집을 잧아 술을 한잔 두잔 마시기 시작한다. 지금의 지인과 나누었던 프로야구는 10년뒤에나 나오는 이야기이니, 아버지가 좋아한 제임스조이스와 빅토르위고 펄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그리고 비틀즈중에서 폴메카트니를 좋아한다라고 말하자, 아버진, 대뜸 웃으며, 존레논이 좋다며 대답을 할것이다. 그리곤 나를 핀잔하며, 계집애들이나 좋아하는 폴매카트니를 왜 더 쳐주냐고 웃을 것이다. 3살된 첫째와 갓태어난 둘째가 있다라고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들어가 있다. 그리고 꿈에 대해 이야기한다. 군대이야기와 연애이야기 드리고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 그는 나에게 어디서 많이 본것 같다라고 말을 하지만, 나는 '그만큼 임형과 자주 만나서일 것이요' 하고 자연스럽게 받아 넘긴다. 12시 통금시간이 다가오는 와중에 우리는 그렇게 다시 만날것을 기약하고 헤어진다.

상상의 나래에서 나는 그의 뒷모습을 본다.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귤이 담긴 봉지를 한손에 들고 느릿느릿 취기있는 발걸음으로 걷고 있는 그의 뒷모습을 말이다. 그는 꿈이 있었으며, 잘못된 세상을 비판하기도 하며, 첫사랑을 못잊기도 하였다. 2명의 자식을 사랑하며, 빈손으로 결혼해서 고생하는 아내를 위로하기도 하였으며, 부모님 걱정과 동생들 걱정에 한숨을 쉬기도 하였다.  

'...........'
'야 뭐라고? 잘 안들려~~~'
'가기전에 한잔 해야지'
'으..응 그래 또 전화하마.'

지인과 전화를 끊고, 거실에 있는 가족사진을 한참을 바라본다. 막내가 30이 넘었는데도, 변변한 가족사진없는 아버지는 항상 무뚝뚝하게 새해에 말씀하신다. 다들 바쁘더라도 주말에 짬을 내어 가족사진을 찍자고 말이다.
가족사진과 무둑뚝함과 거리가 있음일까? 흐릿한 웃음을 지으며, 형과 나는 조용히 긍정도 부정도 아닌 답을 내어 놓지만, 멀리 있는 형과 곧 나도 훌쩍 떠나는 처지인지라 올해도, 가족사진은 내년으로 기약해야 할것 같다.

형이 학위를 받고 좋아하시는 그의 사진속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 본다. 두세걸음 걸어가 서재에 노크하면 계실 그이지만, 거실에 서서 한참이나 바라본다. 상상의 나래에서 그보다는 인생의 굴곡이 있는 그이지만, 그때 1970년도 대포집에서 헤어지고 정말 열심히 산 그이기에, 사진 속 그의 얼굴은 어느때보다도 행복한 웃음이 베여있다.

 31살 접점에서 만난 그와 나는 다시금 30년이라는 공백에 있다. 하지만, 그와 나눈 이야기 속에 현재의  나는 나이가 더 먹어도 그에게는 어리고 어린 자식으로 밖에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가족의 무게를 지고 돌아서는 그의 발걸음을 기억하며, 차츰 그의 어깨에서 나의 어깨로 옮아 오는 무게를 아직은 낮설지만 반갑게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그 또한, 낮설게 빠지고 있는 어깨의 무게를 느끼고 있을 것이다. 지금 2010년도 어느 날에 말이다.
2010/02/04 03:53 2010/02/04 03:53
Posted by 정윤